최인규 권사는 1881년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마흔 살이 된 1920년, 마을에 찾아온 서양인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북평교회에서 권사가 되었다. 최인규 권사는 1933년 가족과 함께 샘실마을(천곡동)로 이주했다. 샘실마을에는 북평교회가 1925년에 개척한 천곡교회가 있었지만 교역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를 이끌기 위하여 스스로 이주해 온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여 교우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서로 도우며 생활하면서 교회를 섬겼으니 마치 초대교회 모습 같았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최인규 권사와 천곡교회 사람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감리교단은 이미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해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등 일제의 모든 압박을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결국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 거부 주동자로 몰려 1940년 5월 구속되었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일제는 그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똥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게 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함흥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는 절대 할 수 없다.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도 망했다. 일본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고, 결국 2년형을 받았다. 1941년 사상범을 수감하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곳에서도 끈질긴 회유가 이어졌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어느 목사가 “일단 신사참배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라”고 조언하자 최 권사는 ”당신이 목사인 줄 알았는데...“라며 돌아앉아 다시는 마주보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지켰다. 결국 계속되는 고문에 음식조차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1942년 12월 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최인규 권사가 갇혔을 대 뒷바라지하던 천곡교회는 결국 1943년, 최인규 권사가 순교한 후 일제의 강압과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대전 인근 야산에 가매장되었던 최인규 권사의 유해는 해방 후에야 친척의 손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1947년 3월에는 삼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인근 7개 지역 교회가 함께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또 1986년 11월에는 최인규 권사의 유해를 새로 복원한 천곡교회 마당으로 옮겼고, 순교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최인규 권사의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 곳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