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진 목사는 1890년 경기도 평택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한 농가였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서당에 보내 한학을 배우게 했다. 17세 될 무렵, 일거리를 찾아 수원에 온 그에게 두 청년이 불쑥 예수 믿을 것을 권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소년 봉진은 청년들에 이끌려 수원교회(현 종로감리교회)에 등록했다. 불같은 믿음이 그에게 일어났다. 교회의 여러 일에 앞장서 봉사했다. 이런 청년의 모습을 눈여겨본 한 권사님으로부터 금은세공기술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가 점포를 열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청년 박봉진은 1920년대 초 평택에 설립된 성결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 그는 1923년 새 예배당을 지을 때 건축비의 거의 전액을 헌금했고, 당시 발행된 성결교 신앙잡지 <활천>을 통해 믿음을 키워나갔다. 1924년 10월, 평택교회에서 열린 이명직 목사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고, 1928년 수원성결교회를 개척한 이성봉 전도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32년 봄, 박봉진은 성결교 신학교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은 신학생들에게 1년 중 3개월은 이론을 가르치고 9개월은 현장에서 전도사역을 담당하도록 했다. 박봉진은 신학교 재학 3년 동안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서 사역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935년 신학교를 졸업한 박봉진 전도사는 첫 사역지로 여주교회에 부임했고, 1년 후에는 이천교회에서 사역했다. 1938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치욕적인 해였다.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를 때로는 거부하고, 때로는 회피하며 교인들에게 영적 양식을 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성봉 목사와 함께 부흥회를 열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941년 박봉진 목사는 철원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철원교회는 당시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박 목사는 말씀을 통해 교인들을 추스르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성결교단은 물론 모든 교단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지만 박봉진 목사를 이를 거부했다. 예배 때마다 동방요배와 황국신민의 서사를 읽게 했지만 박 목사가 시무하던 철원교회에서는 일제 경찰들이 예배를 감시할 때는 이를 행하고, 없을 때는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사참배만은 절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1943년 5월, 전국 교회에 검속령이 내려졌고,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박봉진 목사도 이때 철원경찰서에 끌려갔다. 이후 박 목사는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배교를 요구받았다. 결국 고문을 견디다 못한 박 목사는 수감 3개월 만에 탈진하여 보석으로 나왔으나 1943년 8월 15일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