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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전치규 목사(1878~1944)_침례교

전치규 목사는 1878년 경상북도 울진 근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향에서 농사와 서당 훈장으로 일하던 그는 32세 되던 1910년, 대한기독교회(침례교 전신) 전도인에게서 복음을 듣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곧바로 원산으로 가서 이후 약 6년간 말콤 펜윅 선교사가 설립한 성경학교에서 성경과 신학을 배웠다. 당시 원산에서는 펜윅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추진하던 성경번역과 달리 홀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전치규는 이 일에 함께 했다. 당시 그는 펜윅이 번역한 한글 성경을 붓글씨로 여러 차례 옮겨 썼다고 전해진다.

전치규는 1916년 9월 펜윅 선교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약 8년 동안 강원도와 충청지역에서 교회를 돌며 복음을 전했으며, 1924년 이종덕 목사에 이어 동아기독교회 3대 감목(총회장)이 되어 약 10년 동안 헌신했다. 감목으로 재임하던 시절 전치규 목사는 만주와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 12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전치규 목사가 만주 등 외지 선교에 힘쓴 것은 일제강점기의 교회 탄압과 타 교단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침례교에 비해 교세가 컸던 장로교, 감리교 등에 비해 침례교는 선교지역 배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큰 교단 선교사들과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들과의 갈등을 피해 선교지역을 찾다보니 한반도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곳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 동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국을 떠난 동포를 상대로 한 전도는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어려웠지만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는만 47개 교회를 세울 정도로 보람도 컸다. 

감목 취임 10년만인 1934년 김영관 목사에게 감목의 직을 넘긴 뒤에 전치규 목사는 전국과 외지를 돌며 순회 설교자로 헌신했다. 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다. 한국 침례교회의 개척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펜윅 선교사도 내한 46년 만인 1935년 선교사명을 마치고 소천한 상태였다. 1938년에는 가장 큰 교단 장로교마저 신사참배에 동참했다. 그러나 동아기독교는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결국, 일제는 1939년 김영관 감목, 이종덕 전 감목, 전치규 전 감목, 백남조 목사 등 4명을 6개월 간 구금했고, 1941년에도 이종근 감목, 김영관 전 감목, 전치규 전 감목, 노재천 목사를 3개월 동안 구금하는 등 탄압을 거듭했다. 결국, 일제는 1942년 6월, 전치규 목사를 비롯한 32명의 동아기독교회 지도자들을 일제히 구속했다. 죄목은 천년왕국설 설교로 인한 천황모독죄와 신사참배, 동방요배 거부로 인한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대부분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전치규 목사만은 석방되지 못했고, 오히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전치규 목사는 1944년 2월 14일, 원산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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