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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최봉석 목사(1869~1944)_장로교

‘예수 천당’ 외침과 ‘노방전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최봉석 목사는 186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지방관아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최봉석은 한학을 배워 정부 관리로 일하다가 공금유용의 죄를 저질러 평북 삭주로 유배를 당했다. 유배지에서 어린 시절 배운 학문과 착한 성품으로 지역 유학자의 사위가 되었고, 양조사업과 금광사업을 벌였으나 실패를 하여 어려움에 처했다. 그때 유명한 한의사에게서 예수의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중 노블 선교사의 권면을 듣고 복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최봉석은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다. 유학자의 집에서 성장한 아내는 예수를 믿는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최봉석은 더욱 전도에 열심을 냈다. 1905년 삭주교회의 집사가 되었고, 권서와 전도인으로 헌신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4년 동안 7곳에 30여개 교회가 세워졌다. 

최봉석은 1908년, 마흔 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노방전도의 사람이었다. 신학교 재학 시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했고, 날마다 평양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했다. 이처럼 그의 전도방법은 단순했지만 능력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최권능’ 목사라고 불렀다. 시험이 있는 날에도 새벽기도와 노방전도를 그치지 않았고, 그 탓에 3년이나 졸업이 늦어졌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만주와 국경지대였는데 그곳에서도 ‘예수 천당’을 외치며 약 30여 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14년 동안의 만주 선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최봉석 목사는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 되어 예전과 같이 날마다 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쳤다. 서문밖교회 인근에 전도관을 차리고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한국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굴복하며 부끄러운 날을 보내게 되었을 때, 최봉석 목사는 신사참배를 결정한 총회를 ‘사탄의 모임’이라고 질타하며 거부했다. 일제는 거리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신사참배는 물론 창씨개명도 거부하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1939년 구속되어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죄목은 독립운동, 미국 선교사와 내통, 교인선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민심소란 죄 등이었고, 함께 구속된 이는 주기철, 한상동, 이기선, 안이숙 등이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도, 형무소에서도 ‘예수 천당’의 외침은 그치지 않았고, 그때마다 고문이 이어졌다. 이러한 수감생활은 무려 6년 동안 이어졌다. 

1944년 3월, 3.1독립운동 25주년을 맞은 최봉석 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감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75세였다.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40일간 이어진 금식기도는 그의 몸을 극도로 망가뜨렸다. 죽음을 직감한 일제는 그를 병보석으로 내보냈으나 직후인 1944년 4월 15일, 하나님나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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