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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신석구(1875~1950)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는 1875년 청주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석구는 15세에 부친을 잃었고, 20대 초반에는 믿고 의지하던 형마저 갑자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먼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친구의 전도를 받았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내심 그는 갈등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났다. 예수가 자신을 자유케 하리라는 확신이 솟구쳐 올랐다. 스스로 삶을 자각하기 시작한 이후 20여 년 동안에 저지른 죄가 한꺼번에 생각났다.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1907년 7월 14일, 주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신석구는 훗날 이날의 일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했다.
고향 친구 정춘수의 권유로 개성에 와서 감리교 의료선교사 리드의 어학교사가 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왓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신석구는 1908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왓슨 선교사가 시무하던 개성북부교회에서 전도인을 거쳐 1910년 이후 8년 동안 홍천, 가평, 춘천 등 강원도 지역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했으며, 1917년 9월, 집사목사로 안수받았다.
1918년 11월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수표교교회는 당시 서울에 있는 10여 개 교회 중하나로서 교세 도한 작지 않은 교회였다. 그때까지 그는 신학교를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고, 8년 동안 강원 산골에서 사역한 집사목사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자리였다. 3.1운동을 대비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3.1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감리교의 대표적 목회자였던 오화영 목사로부터 함께 할 것을 요청받았다. 신석구 목사는 즉시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당시 33인의 민족대표 중 기독교인은 16인, 그중 감리교인이 9명, 장로교 7명이었다. 1919년 3월 1일, 신석구 목사는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 선포식에 참석했다. 곧바로 남산에 있는 경무총감부에 연행 구속되었다. 신석구 목사도 함께 구속되었으며, 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11월 4일, 2년 8개월 3일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다.

출옥 직후 강원도 원산 상리교회에서 사역했다.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약 3년 동안 담임목사로 재임했으나 실제로는 넉 달 도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목회를 한 셈이다. 이곳에서 협성신학교를 입학 15년 만에 마치고 정식 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후 신석구 목사는 고성, 춘천, 가평, 철원, 황해도 한포와 경기도 이천, 충청도 천안, 평안도 진남포에서 1941년까지 사역했다. 원산에서부터 진남포까지, 여런 곳을 전전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단 1년 동안 사역했을뿐 신목사가 거친 곳은 모두 시골교회였다. 

신석구 목사가 천안지역 감리사로 사역하던 1935년 중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졌다. 처음에는 모든 교회가 이에 반발했지만, 감리교는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나섰다. 1937년 6월, 조선감리교회는 ‘신사가 국가의식이라는 일제 총독부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동향의 친구였고, 그에게 믿음을 전한 감리교 목사로 함께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정춘수 목사가 일제에 협력하며 친일의 길에 들어섰으나 그는 이에 분연히 반대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참여했던 대동아전쟁전승기원예배에 참석하지 않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친구 정춘수 목사가 일본기독교단 조선감리교단의 총리사가 되어 친일에 협력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찾아가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결국 신석구 목사는 친일교회가 된 조선 감리교로부터 강제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제의 예비검속 대상자가 되어 구금되었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가 석방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1945년 5월 또다시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받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그의 나이 71세였다.

해방 당시 이미 정년을 넘은 나이였으나 지역 교회들의 요구에 따라 여러 교회를 오가며 목회자로 헌신했다. 당시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은 신석구 목사의 명망을 이용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신석구 목사는 이들의 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았고, 민족대표 33인이라는 명망으로 북한에 남은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을 공산정권의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진력했다. 그동안 두 차례 투옥되었고, 수시로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지키겠다며 이를 거절했다.
1949년 4월 19일, 이른바 진남포 4.19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용강 문애리교회에서 4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을 제거하기 위해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결국 신석구 목사는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침공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은 유엔군 참전 이후 북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38선이 무너졌으며, 평양마저 빼앗기게 되었을 때, 북한정권은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던 애국반공지사들을 일시에 처형했다. 그 속에는 신석구 목사도 함께 있었다. 1950년 10월 10일의 일이었다.
후일 신석구 목사의 유해는 형무소 안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신석구 목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68년 9월, 그의 유택을 국립묘지에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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