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의 순교자로 알려진 김정복 목사는 1882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출생했다. 20대 초반에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가 3년 만에 귀국했다. 당시 하와이 이민이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도 감리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김정복은 1907년 하와이에서 살면서 세례를 받았으며, 1908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에 있는 종지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종지교회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아들을 통해 생가 바로 옆에 1904년에 설립한 교회로 충남지역 초대교회 중 하나이다. 고향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한영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16년 전라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8년 만인 1924년에 신학교를 졸업(17회)과 함께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정복 목사는 제주도에 있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으며, 교회가 경영하는 영흥학교와 영신학교에서 성경교사로도 헌신했다. 1928년 순천노회소속 벌교읍교회로 임지를 옮겼으며, 고흥읍교회와 길두교회에서도 목회했다. 그는 순천노회 서기를 거쳐 순천노회장도 역임했다. 1938년 4월, 김정복 목사가 소속된 장로회 순천노회가 구례읍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러나 김정복 목사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1940년 9월과 11월, 두 차례 구속되어 순천경찰서를 거쳐 광주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받았다. 김정복 목사는 1943년 8월, 일제로부터 3년6개월 형을 받았으며, 해방된 뒤에 나올 수 있었다.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기간과 수감 기간을 합하면 약 5년 동안 갇혀 있었던 셈이다.
김정복 목사는 1946년 4월, 소록도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소록도에 있는 일제에 의해 강제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은 해방된 이후에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해방 직후 발생한 학살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김정복 목사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소록도교회의 재건을 위해 이곳에 왔으며, 아예 이곳의 담임목사가 된 것이었다. 김정복 목사는 이전부터 있었던 교회들을 재건하고 통합하였으며, 중앙교회당을 지어 소록도 전체를 보살피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소록도 뒷산 중턱에 기도굴을 만들어 틈날 때마다 이곳에서 기도했다. 교회는 날로 부흥했으며 환자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어 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은 소록도를 다시 아픔의 현장으로 바꾸어버렸다. 소록도는 1950년 7월 30일, 북한군에 점령당했으며, 이로부터 56일 동안 공산치하가 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김 목사는 교우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며 교회를 지켰다. 그러나 교회는 폐쇄되었고, 예배와 기도도 중지되었다. 김 목사는 산속 기도굴에 은신하여 기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군은 김 목사를 찾기에 주력했다. 한 청년의 밀고로 기도굴에서 잡힌 김정복 목사는 고흥군 보위부로 끌려갔다. 1950년 8월 28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9월 28일, 고흥 내무서에서 끌려나와 고흥읍 뒷산에서 총살을 당하고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섰다.
(현재 소록도중앙교회 마당과 고흥읍 등암리 묘소에 김정복 목사의 순교기념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