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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김철훈(1905~1948)

일제의 탄압과 공산주의의 압제를 이겨내고 믿음을 지킨 김철훈 목사는 1904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김경덕)이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4년의 옥고를 치루면서 가세가 기울어 매우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독립운동의 대를 잇기 위해 민족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의거에 동참하여 학교 시위를 주도하고 검거되어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투옥과 고문의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했으며,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1936년 초, 모교인 숭실학교 교목으로 부임했으나 학창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교목이 될 수 없다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3개월 만에 면직되고, 일반 교회에 부임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통치 아래서 목회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을 향해 치달리던 때였다. 처음 부임한 용강읍교회에서는 일제가 교회에 일장기를 달 것과 동방요배를 강요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사임했으며, 새로 옮긴 교회인 송산리교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고, 곧바로 소위 농우회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세 번째 옥고를 치렀다. 결국 송산리교회에서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부임한 삼성리교회에서도 성서조선 잡지의 필화사건에 연루시켜 또다시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처럼 김철훈 목사는 약 9년 동안의 일제강점기 목회활동을 통해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약 2년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김철훈 목사는 조만식 선생이 이끈 북한 지역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동평양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이북지역 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복음전파에 주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그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철훈 목사는 친공산주의 기독인들이 구성한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으나 이를 거절했으며, 1947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된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강력히 반대했다. 

김철훈 목사는 1948년 2월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고 해방을 맞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간청에 따라 담임목사로 부임해 산정현교회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5일, 공산정권에 납치되어 사리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의 행방과 생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 순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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