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식 목사는 1893년 평안남도 평원(숙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평양신학교를 2회로 졸업한 김찬성 목사였지만 오지를 돌아다니며 전도에만 열중했으므로 가정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야학으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청년 김화식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하여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투옥된 감옥에서 함께 갇힌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중에 후일 목사가 되어 총회장을 지낸 이(이원영 목사)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김화식은 고향 숙천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안주 동북교회, 용천 양시교회에서 시무한 후 1931년 신성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약 5년 동안 활동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점점 가혹해질 무렵에 학교에서 교목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교목 시절 김화식 목사는 학생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김화식 목사는 신천남교회를 거쳐 1936년부터 평양 창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 이유택 목사와 함께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양의 교계 지도자로 인정되었으며, 특히 경건한 설교자로 이름이 높았다. 또 주기철, 이유택 목사 등과 함께 평생 신앙동지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해방 후에는 장대현교회에 부임하한 김화식 목사는 기독교 정신의 실현을 위한 정치활동에 나섰다. 김관주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북한정권에 누설되어 1947년 11월 검거되었다. 김화식 목사는 북한정권에 의해 13년형을 선고받아 탄광에서 강제 노역 중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