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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남궁혁(1882~1950)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인 남궁혁 목사는 1882년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출생 직후 발생한 임오군란 때 난리를 피해 용인으로 낙향해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일찍 복음을 받아들인 전도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14살 때 배재학당에 입학해 1900년 졸업했는데, 그 후 인천세관과 목포세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원이었던 셈이다.

남궁혁은 목포세관에서 일할 때인 1903년, 유진 벨 선교사로부터 양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7년에는 유진벨이 세운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후에는 광주 숭일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남궁혁은 배재학교 재학 시절부터 뛰어나서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은 수재였다. 선교사들은 남궁혁이 장차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할 인재로 보고 있었다. 결국, 남궁혁은 선교사들의 중매를 통해 당시 정신여학교 출신의 김함라와 서울 연동교회에서 1908년 게일 선교사의 주례로 혼인했다. 1917년 남궁혁은 35살의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내 김함라의 기도의 결실이었다. 남궁혁은 1919년 일어난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광주에 있는 그의 집에서 3월 10일 벌어진 광주독립만세운동을 모의했으며, 검거되어 옥고를 지렀다.

남궁혁은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22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광주 양림교회에서 1년간 목회자로 섬긴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1923년),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학박사 학위 취득이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온 남궁혁은 모교인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역시 한국인 최초의 교수였다. 학생들의 신망을 얻고 충실하게 교수의 역할을 감당했다. 성경개역, 성서주석, 그리고 신학잡지 <신학지남>의 편집인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박형룡, 김재준, 송창근 목사 등이 그의 뒤를 이어 신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어 우리나라 신학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38년 한국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용인하기로 결의했으나, 평양신학교는 이에 저항하며 스스로 학교의 문을 닫았다. 남궁혁 목사 역시 교수직에서 물러났으나 <신학지남> 편집자의 역할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 일제에 의해 <신학지남> 마저 폐간되자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1946년 5월, 중국거류민의 대표가 되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공무원으로 조국의 재건에 참여했다. 미 군정청에서 적산을 환수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이어 세관업무 고위 관리자가 되었다. 이는 그가 구한말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직원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혁 목사는 1948년 교회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관심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었다. 가장 먼저 기독교서회 이사장이 되어 재건에 헌신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3대 총무가 되어 교회 일치운동을 주도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통합을 위한 합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4월의 부활절연합예배를 주관했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1950년 8월 23일,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까지 끌려갔다. 평양에서 그는 북한군의 회유외 협박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자진 월북했다고 방송하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강요를 결단코 뿌리쳤고, 결국에는 단식투쟁을 하다가 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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