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문 목사는 1905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 강계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구한말 무과에 급제해 함경북도 함흥을 지키던 무관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의병활동에 투신해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했다. 이어 어머니마저 나라 잃은 백성이지만 이민족의 노예로 살 수는 없다며 자신은 물론 자녀들 모두에게 약을 먹여 자결했다. 그러나 두 살짜리 막내만큼은 스스로 죽일 수 없었던지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된 아이는 강계에 살고 있던 고모에게 보내졌다. 그 아이가 바로 서용문 목사였다.
소년 서용문은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산골에서 나무를 하면 살았다. 그러던 중 산골에서 길을 잃은 한 여인을 만나 길을 찾아주었는데 그가 바로 전도부인이었다. 그녀로부터 선물로 받은 쪽복음으로 갖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15살 되던 때 서용문은 고모집을 나와 스스로 살기로 작정했다. 미션학교인 영실학교를 찾아가 배움을 간청했으며,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일을 도우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교장 선생님은 캠벨(감부열) 선교사였다.
영실학교를 마친 서용문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일과 공부와 전도를 겸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목회자의 꿈을 포기했다.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 주변의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시작했다.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은 버릴 수가 없었다. 니느웨를 버린 요나의 심정이 그의 마음이었다. 결국 그가 아버지같이 다르던 캠벨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마주에 있는 봉천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 해방이 되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압록강변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1946년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 보령교회의 청빙을 받아 평양에 왔다. 41살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목회는 순탄할 수가 없었다. 공산정권이 만든 조선기독교도연맹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가입을 강요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서용문 목사는 단호하게 믿음을 지켜나갔다.
결국 6.25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에게 평양을 빼앗길 무렵인 1950년 10월 11일, 서용문 목사는 패주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 대동강변에 시체가 널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아들에 의해 주검이 발견되었다. 서용문 목사의 주검은 다섯 명이 함께 묶여 있어서 물에 가라앉지도 않고 떠 있었고,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