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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송정근(1895~1950)

송정근 목사는 1895년 황해도 서흥의 엄격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11살 때 세레를 받았으므로 일찍부터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러린 시절 그는 아버지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이웃마을 황주에 마펫 선교사가 세운 양몽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어 그는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베어드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918년 숭실학교 교원학습과까지 마치고 약 2년 동안 소학교 교사로 일했다.

송정근은 192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휴학하고 감리교회에서 전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1924년 서울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에 편입학하여 1927년 졸업했다. 목사가 된 송정근 은 개성과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등 북쪽 여러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진남포지역과 강서지역 구역장이 되었고, 강서교회에서 시무하던 1940년대 초에는 서부연회 감리사도 역임했다. 그는 한 교회만 담임한 것이 아니라 지역 모든 교회를 돌며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였고, 각종 학교에서 사회교육도 담당했다. 

송정근 목사는 일제강점 말기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7년이나 담임하던 강서교회에서 일제의 침략정책과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쫓겨났다. 이어 시무하게된 평양 기림리교회에서도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때에 쫓겨났으며, 아예 목사직마저 강제로 박탈당했다. 이후 송정근 목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뒷산에 토굴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며 교회와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며 지냈다. 

송정근 목사는 고향의 토굴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1945년 10월, 평양 남산현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어 평양지방 감리사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평양, 철원, 원산까지 아우르는 서부연회의 연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평양 제일의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북한 공산정권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가입을 거부하고 김화식 목사와 함께 기독교민주당 창당에 동참했다. 1947년 11월, 기독교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사경을 헤매었으나 신석구 목사 등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풀려났다. 이후에도 송 목사는 북한 공산정권의 협조요구를 묵살하고 오로지 교회를 지키며 교인들을 보살피는 일에 전력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경, 남침 직전의 시간에 송정근 목사는 집으로 찾아온 내무서원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기간 내내 평양형무소에 갇혀 고문과 핍박에 지내다가 10월 10일, 평양을 빼앗기게 된 공산군의 마지막 처형 때 수감 동지들과 함께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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