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준 장로는 187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집안이 넉넉하였으나 그가 13살 때 부친이 이름 모를 불치의 병에 걸려 가산을 치료비로 탕진한 후 사망했고, 소년가장이 된 그는 할 일을 찾아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에서 유계준은 무역상에서 점원으로 성실히 일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스스로 장사를 시작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힘도 장사였고 사업수완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 수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혼란한 시국 속에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술에 탐닉했고, 막 시작된 서양인들의 전도현장을 보면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렸으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어느 날, 유계준은 평양 거리에서 한 선교사와 한석진 조사와 김창식 조사가 마펫 선교사가전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두들겨 패고 관아에 고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구속과 폭력을 무릅쓰고 다시 거리에 나와 전도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그들을 유계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에 대해 물었고, 그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이후로 그의 믿음은 한결같았고, 뜨거웠다.
20대 후반에 믿음을 갖게 된 유계준은 처음에는 장대현교회에 출석했으며, 얼마 후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성심을 다해 교회를 지켰고, 목회자들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또 3.1운동을 후원하고, 숭덕학교와 숭인학교를 세웠으며, 상해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의 평안도 보급책으로 활동하며 독림운동을 후원했다. 그는 사업가의 입장에서 매우 거부하기 어려웠던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정도로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유계준은 사업가로서도 남달랐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여 10척이 넘는 무역선을 보유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모은 돈은 좋은 일에 교회 험금과 좋은 일에 사용했다. 평양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평양양로원의 원장으로 취임해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도 그의 목시었다.
그는 45세에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당시 산정현교회에는 조만식 장로, 오윤선 장로가 있었는데 유게준 장로와 함께 산정현교회의 장로 3총사로 불렸다. 조만식 장로는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오윤선 장로는 숭덕학교를 세운 교육 지도자였으며, 유계준은 기업인이자 숭인상업학교를 세운 실업계의 거장이었다. 특히 이들은 신사참배 반대의 기수였던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청빙하는 일에 뜻을 모았으며, 신사참배를 죽음으로 거부한 주기철 목사를 도와 산정현교회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지켰다.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이도 유계준 장로였다. 산정현교회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집에서 기도모임과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지켰다.
해방된 이후에도 산정현교회의 복구를 위해 노력했으며, 많은 이들이 월남했지만 가족들은 월남하도록 했으나 자신은 고향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6.25 남침 이틀 전인 6월 23일, 보위부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직전인 10월 초 유계준 장로는 함께 갇혔던 이들과 함께 행방이 묘연해졌다. 결국, 순교의 피를 뿌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