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소성면에 있는 두암교회에는 6.25전쟁 중에 학살당한 23인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윤임례 집사는 1894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그녀가 32세 때 4남1녀의 자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홀몸으로 다섯 자녀를 올바로 키우기 위해 무진 애를 섰다. 그러던 중 가족 중 장남 김용은이 기장 먼저 예수를 영접하여 전도사가 되었고, 이후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김용은 전도사가 고향인 두암마을에 교회 개척의 소명을 갖고 온 것은 1949년 초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복음이 전해졌으나 마을에 교회가 없어 먼 곳으로 다녀야 하는 어려움을 알고 있던 김용은 전도사가 고향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 것이다. 두암마을에서의 첫 예배는 1949년 1월 7일, 윤임례 집사 집에서 열렸다. 그리고 곧 온 동네가 예수를 믿는 마을이 되었다. 아들 김용은 전도사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한 것이었으므로 학기 중에는 어머니 윤임례 집사가 목회자의 어머니로서, 또 마을의 어른으로서 교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 김용은 전도사는 친구인 임동선 전도사와 함께 두암교회를 비롯한 인근 세 교회에서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흥회를 열었는데, 이 부흥회에서 공산주의의 잘못과 페해를 역설하여 온 동네 사람들이 반공의식이 높았으며, 이런 상황이 후일 두암교회에서의 집단 학살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정읍 두암마을도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을을 점령한 공산군은 두암교회가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이라고 판단해 교회를 폐쇄시켰고, 예배를 금지시켰다. 아울러 교인들을 내무서로 잡아가 기독교를 믿지 말 것을 강요하며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며,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곤 했다.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공산군은 더욱 집요하게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윤임례 집사의 차남 김용채 집사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사울을 탈환한 이후 퇴로를 막힌 공산군들은 빨치산이 되어 더욱 극력하게 저항했다.
10월 19일, 수십 명의 공산군이 두암마을로 들어왔다. 두암교회 교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습격이었다. 모두 22명의 교인이 몽둥이에 맞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숨졌으며, 예배당과 교인들의 집은 불에 태워졌다. 이날 윤임례 집사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공산군의 칼에 뒷목을 관통 당해 숨졌고, 며느리와 손자 3명은 우물에 수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