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홍준은 184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의주는 청나라와의 교역의 중심지였고 개화의 시발점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만주를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신기한 물건을 가져오곤 했다. 물건 중에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도 있었다. 호기심 많은 소년 백홍준에게 새로운 책은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만주는 소망의 땅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1876년, 청년이 된 백홍준은 만주를 향해 장사의 길을 떠났고,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났다. 처음 만난 지 3년만인 1879년, 백홍준은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다.
로스 선교사는 성경 번역을 통한 조선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 선교사는 백홍준과 이응찬, 서상륜 등의 도움을 받아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백홍준은 1882년부터 1887년 사이에 만주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조선 땅에서는 아직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고 있었다. 성경을 들여오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이 백홍준에게 주어졌다. 권서인이 된 것이다.
성경을 낱장으로 분해하여 새기로 꼬았고, 이를 이용해 봇짐을 등에 지고 세관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풀어헤쳐 낱장 성경으로 만들었다.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자생 기독교인에 의한 전도와 예배가 의주와 평안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백홍준이 있었다.
1885년 4월, 부활절날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인 선교사에 의한 선교가 시작됐다. 1887년 9월에는 14명이 교인이 모여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정동교회, 현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백홍준과 언더우드의 만남은 조선 선교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특히 1889년 4월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만주에서 베푼 집단 세례의 배후에는 백홍준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백홍준은 보다 본격적인 전도를 위해 새문안교회 성경학교를 수료한 후 북장로교 선교부 관서지역 조사가 되었으며, 1892년부터 선교사들과 함께 의주와 평양에서 사경회를 열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1892년 가을,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던 평양감사 민병석은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관심을 서양종교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가장 대표적인 전도자였던 백홍준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구속하고, 배교를 강요했다.
약 1년여 동안 가혹한 고문과 강요 속에서 믿음을 지킨 백홍준은 1893년 말, 옥중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최초의 세례자가 첫 순교자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순교자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백홍준을 ‘장로’로 부르고 있으나 그가 새문안교회에서 첫 장로로 피택되었다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