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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소개

 
박관준(1875~1945)


박관준은 1875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대부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탄했던 그의 인생은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재산을 모두 잃는 첫 번째 파란을 맞았고, 이를 어렵게 극복하여 다시 거부의 반열에 들었으나 아내의 유산, 부모의 별세로 두 번째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주색에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병에 걸려 죽을뻔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들었다.

1905년, 그의 나이 30이 되는 해였다. 책을 읽던 중 하늘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소리로 들었다. 그리고 그날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갑작스러운 체험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인 그의 믿음은 뜨거웠다. 지난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다.
1910년에 벌어진 일제의 강제병탄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시골에서 하가롭게 농사만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일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로 올라와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1915년에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민중을 살린다는 의미로 제중의원을 세워 병든 이들을 고쳤고, 아울러 전도하기에 힘썼다. 동네에 소학교와 예배당을 지어 스스로 예배를 인도했다. 

박관준은 개천에서 십자의원을 열고 생활하던 1934년에 개천읍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며, 이후 평양을 거쳐 고향인 영변에 정착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박장로가 기도중에 환상을 보았다. 흰옷을 입은 천사 같은 이가 나타나 ‘나를 위해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그가 대답했다. ‘제가 피를 흘리겠나이다.’ 환상에서 깨어난 후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명령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당시는 일제가 모든 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때였다.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환상에서 깨어난 후 박관준 장로는 평양을 향해 떠났다. 그는 신사참배를 막기 위해 총독과 도지사에게 반대격문을 보내기 위해 총독에게 보내는 충고문을 썼으나 일제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격문은 빼앗겼고 형무소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소식을 형무소에서 듣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석방된 후에도 2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충고문을 보냈고,  미나미 총독을 직접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한두 번의 투쟁에 그칠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계속 투쟁해서 내가 죽든지 일제가 패망하든지 양단간에 끝장을 내고 말리라.’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 결국 박관준 장로는 이제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서 일왕을 상대로 반대투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관준 장로는 안이숙 선생을 찾아가 함께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에 온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각계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설명했다. 일부 일본지식인들이 취지에는 공감했으나 투쟁에 동참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결국, 박장로와 아이숙 선생은 이를 널리 알릴 방법으로 마침 동경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제국의회(중의원) 회의에 방청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격문을 뿌리기로 하였다. 

1939년 3월 24일, 일본제국의회 의장이 제74회 회의가 개회됨을 선언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 그리고 수백 장의 격문이 회의장에 뿌려졌다. 제국의회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세 사람은 경찰에 연행됐다. 약 40일 동안의 취조를 당한 후 세 사람은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비록 수감은 당하지 않았으나 고향에 연금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더욱 강력해졌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온갖 명목을 붙여 검거하고 투옥했다. 박관준 장로 역시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1941년 봄, 영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신의주교도소를 거쳐 평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신사참배가 죄임을 역설했고, 일본의 패망을 예언했다. 박관준 장로는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다.

박관준 장로는 1945년 1월, 70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70일 금식을 마친 1945년 3월 11일, 일제는 박장로를 평양기독병원으로 내보냈다. 오랜 금식으로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소식을 들은 가족과 안이숙 선생 등 지인들이 병원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디모데후서 4장 7,8절과 이사야서 11장 10~16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며, 이를 유언으로 남겼다.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관준 장로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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