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육과 감리교 선교 개척
아펜젤러 선교사는 감리교 최초의 복음 선교사로서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서더튼(Souderton)에서 출생했다. 아펜젤러 가문은 믿음의 자유를 찾아 1735년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루터교회 이민가정이었다. 아펜젤러는 웨스트체스터사범학교(Westchester Education College)와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교 재학 시절, 아펜젤러는 전국신학교연합집회에서 한국 선교사의 사명을 깨달았고, 그곳에서 후일 함께 한국에 온 언더우드를 만났다.
아펜젤러는 신학교를 졸업한 1884년 12월 한국 선교사에 임명되었고, 그보다 사흘 전에 선교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엘라 닷지
(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 한 달 뒤인 1885년 1월, 한국을 향해 고향을 떠났으며, 샌프란시스코, 일본을 거쳐 3개월 만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최초의 복음 선교사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한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함께 내한한 아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미국 푸트 공사의 권유로 아펜젤러 부부는 내한 일주일만에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6월 20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로 재입국하였고, 7월29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설립
한국에 온 아펜젤러 선교사가 벌인 첫 사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1885년 8월 시작된 학교는 1887년 2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순직한 1902년까지 14년 동안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7년 10월 9일, 4명의 한국인 신자와 함께 감리교 최초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벧엘교회(후에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10년만인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을 헌당했다.
성경 번역에도 헌신
아펜젤러 선교사는 출판 분야와 성서번역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를 초청하여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만들어, 기독교 소책자들을 출판했으며, <독립신문>등 일반신문도 인쇄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선교사 등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대한성교서회 회장을 지냈고, <대한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고 편집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의 미래와 청년들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독립협회 창립, 한국 YMCA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그가 배재학당 안에 설립한 협성회와 정동교회 안에 세운 엡윗청년회는 후일 YMCA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의 침몰로 인해 순직하였다. 순직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양화진에는 배재학당 동문회에서 건립한 추모비가 있으며, 추모비에는 그가 제물포에 상륙하여 드린 첫 기도문(‘우리는 부활절(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