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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Hulbert, Homer Bezaleel

교사로 내한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863년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New Haven)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Dartmouth)대학과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헐버트의 아버지 캘빈 헐버트는 회중교회 목사로서 미들베리대학 학장을 지냈고,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는 다트머스대학 설립자의 후손이었다.
헐버트는 유니온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886년(23세) 국립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초빙되어 벙커, 길모어와 함께 한국에 왔으며, 1891년까지 교사로 일했다. 육영공원에서 헐버트는 영어, 역사, 자연과학, 지리, 수학 등 근대 서양 학문을 가르쳤는데, 1891년 지리도서 <사민필지>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다.
육영공원 축소로 미국에 돌아간 헐버트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권유로 목사 안수를 받고 1893년 북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헐버트 선교사는 감리교 선교출판사인 삼문출판사 책임자와 볼드윈교회(동대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는 한편 1895년부터 선교잡지인 <Korean Repository> 운영책임자로서 문서선교에도 헌신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1895년경부터 이승만, 서재필 등의 독립협회 활동을 적극 지원했으며, <독립신문> 창간에도 관여했다. 1899년부터 YMCA 설립추진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03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현 YMCA)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소위 춘생문 사건에 관여한데 이어 관립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고종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고종황제의 밀사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했으며, 1907년에는 고종황제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여 이준 등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토록 하였다. 헐버트 선교사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후에도 헐버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헐버트 선교사는 평소 한국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자신이 1901년에 창간한 <Korea Review>에 4년 동안 한국 역사를 연재했고, 1905년에는 이를 묶어 <History of Korea>를 출간했다. 이어 1906년에는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를 집필했으며, 아리랑 악보를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1907년 일제의 추방으로 한국을 떠났던 헐버트 선교사는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다시 왔다가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그의 유언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져 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은 아들(Sheldon Hulbert:1896~1897)도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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