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기념재단
> 선교사묘원 > 선교사 소개

선교사 소개

 
Underwood. L. S. Horton(호돈) (1851~1921)

초창기 여성 의료선교의 주역
릴리어스 호튼은 미국 뉴욕 주 앨버니(Albany)에서 태어났다. 호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병을 앓아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으나 20대 말, 선교사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선교사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앨버니신학교(Young Women’s seminary in Albany)와 시카고여자의과대학(Medical College of Northwestern University)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쿠크카운티간호사양성학교와 시카고아동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1887년 4월 인도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하던 애니 앨러스가 벙커 선교사와 결혼하여 제중원에서 떠나게 돤 연유로 제중원 원장 헤론 선교사가 다급하게 여의사 파송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인도 선교사로 내정되었던 의사 호튼이 앨러스 선교사의 후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호튼 선교사는 1888년 3월 조선에 들어와 제중원에서 일했으며, 앨러스 선교사가 담당하던 황후의 시의 역할도 감당했다.

처음 양화진에 묻힌 언더우드 가족
호튼은 애초부터 선교사로 헌신하는 동안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영아소동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언더우드 선교사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1989년 3월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했다. 호튼 선교사가 언더우드 선교사보다 여덟 살 위였다. 결혼 이후에도 호튼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서의 역할은 물론 명성황후의 시의로서, 교육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로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탄된 이후 호튼 선교사는 <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 책임자로 일하는 등 문서 선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잡지 편집을 통해 여성 선교 사역의 중요성과 역할을 알리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호튼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별세한 이후에 <언더우드 전기(Underwood of Korea)>와 <상투쟁이들과 더불어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등 저술 활동에 노력하여 초창기 선교 상황에 대한 이해와 선교역사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호튼 선교사는 아들 언더우드 2세가 한국 선교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1921년 10월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언더우드 가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양화진에서 안식하게 된 것이다. 1999년에는 남편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가 합장되었다.

 
 

(04084)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길 46(합정동)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Tel. 02-332-4155~6 | Fax.02-332-4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