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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Underwood, Horace G.(원두우) (1859~1916)

한국 개신교(장로교) 개척 공로자
언더우드1세(원두우)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다. 선교 초기 현장마다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드물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59년 영국 런던(London)에서 태어나 1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언더우드1세는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와 뉴브런스윅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학생선교 자원운동에 참여한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으며, 조선으로 떠나라는 성령의 명령에 감동을 받고 선교지를 인도에서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한 최초의 복음 선교사였다.

연세대, 새문안교회 설립 및 성경번역의 주역
당시 조선은 기독교 선교가 불법인 상황이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1886년 5월 정동에 고아원을 세웠는데, 이 고아원은 후일 예수교학당, 민노아학당을 거쳐 경신학교로 발전했다. 또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복음 선교에 힘써 1887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 장로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외에도 언더우드 선교사는 문서 선교를 위해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조직했으며,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이후 줄곧 성경 번역에 매진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 내한한 릴리어스 호튼 선교사와 1889년 3월 결혼했으며, 신혼여행을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에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행에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조선인 30여 명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첫 안식년 휴가 때(1891년) 미국의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조선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러 젊은이들이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도록 독려했다. 이에 린튼을 포함한 남장로교 선교사 4명과 에비슨 선교사 등이 언더우드의 강연에 감동되어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1894년 다시 한국에 온 언더우드는 조선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에는 고종황제를 호위하는 역할도 감당했다. 이 시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기도와 황해도에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교육, 교회연합, 출판, 저술에도 큰 성과
그는 교회연합운동과 출판, 저술 활동을 통한 선교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잡지 <The Korea Review> 편집과 <The Korea Mission field> 창간에 관여했고, 성서번역위원장으로서 신약전서 번역 출간에도 크게 기여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황성YMCA 출범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1909년 새로 구성된 장로교독노회의 첫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경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초대 총회장이 되었고,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여 학교를 통한 선교활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치료를 위해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16년 10월, 뉴저지 주에서 5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미국 유니온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잠들어 있는 아내 호튼 선교사와 합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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