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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Soda, Gaichi(소다 가이치) (1867~1962)

양화진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첫 일본인이기도 하다. 
소다는 1867년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다. 청년 소다는 일본과 해외를 떠돌다가 대만에서 살게 되었다. 1899년, 소다가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때 누군지 알 수 없는 한국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는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내한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로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진 혼란기였고,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이 YMCA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한 때에 소다는 YMCA의 일본어 교사가 되었고, YMCA에서 만난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어 독실한 신앙인으로 이화와 숙명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우에노 다키와 결혼했다. 
조선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1910년, 소다는 YMCA 일본어 교사를 사직하고 일본인 경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선교사역에 투신했다. 그는 1911년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했다. 

고아들을 위해 평생 헌신
소다는 1921년 카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의 책임자가 되어 사회사업에 투신했다. 보육원을 담당하게 된 소다는 당시 투옥되거나 조국을 떠난 독립투사들의 자녀를 데려다 보살펴 주었다. 1926년부터는 아내 우에노 다키도 학교를 사직하고 고아원 운영에 동참했다. 이들 부부는 고아들을 보살피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고아들의 대부, 대모로 불렸다. 소다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비를 지원 받아 고아원을 운영했으며, 1939년에는 보육원을 남산 기슭 후암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그러나 소다가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일이 늘어나자 일제 경찰은 보육원에서 항일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짐작하고 그를 조사하기도 했다. 결국 1943년 소다는 보육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원산 일본인교회에서 무보수 목회자로 일했다. 아내는 서울에 남아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소다 선교사는 일제 패망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촉구했다. 소다는 94세 되던 1961년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1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소다 부부가 경영하던 고아원을 인수하여 영락보린원으로 발전시켰는데, 일제강점기에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소다 선교사를 초대한 것이다. 이후 그는 영락보린원에서 1년 동안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양화진에는 한국사회단체연합회와 영락보린원이 함께 세운 묘비와 1989년 일본 카마쿠라보육원이 세운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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