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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Morris, Charles D.(모리시) (1869~1927)

북한 지역과 강원도 선교의 공로자
모리스 선교사는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아일랜드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위그노의 후손으로 1869년 5월 아일랜드 퀸즈카운티(Queen’s County)에서 출생했다. 그는 10대에 부모를 여의었고, 188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모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의 소망을 품었고, 1900년 드루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모리스 선교사는 1900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내한 초창기 5년 동안 모리스 선교사는 평양에 거주하며 평양 이북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그가 맡은 지역은 영변, 혜천, 원산, 선천, 맹산 등 10여 개 지역이었다. 1906년부터 6년 동안은 평안도 영변선교부 책임 감리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40여개 교회를 세웠고 8명의 목사와 장로를 배출했으며, 3,000여명의 신자를 인도했다. 또 영변에 숭덕학교와 숭정여학교를 설립했다. 평양에서 선교 사역 중이던 1903년 9월, 평양외국인학교 교사 루이스 오길비와 결혼하여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선교 사역에 헌신했다. 
모리스 선교사는 약 15년 동안 북한 지역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1916년부터 강원도 원주 선교부에서 원주를 중심으로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이천, 강릉 등을 책임지는 감리사로 활동했다. 선교  환경이 가장 열악한 강원도를 담당한 모리스 선교사는 불철주야 몸을 사리지 않고 오지를 오가며 선교에 전념하였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라는 칭송 들어
결국 모리스 선교사는 1926년 말경 강원도 동해안 일대 전도여행 중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이듬해 1월 1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노블 선교사는 모리스 선교사에 대해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라고 칭송했다. 또한 3.1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한 사람이자 감리교 목사로서 당시 강원도 감리사였던 신흥식은 모리스 선교사가 헌신했던 원주읍교회 마당에 ‘모리스 선교사 기념비’를 세워 ‘선교에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 쏟았다(선교진충갈력)’는 글귀로 그를 기렸다.
그러나 모리스 선교사는 1919년 일어난 3·1운동 당시 원주읍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온 청년들을 일제 경찰에 알림으로써 급기야 원주읍에서의 만세운동을 좌절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당시 그는 강원도 담당 감리사로서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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