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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Moore, Samuel F.(모삼률) (1860~1906)

서울의 두 번째 장로교회 곤당골교회(승동교회) 창립
무어는 1860년 미국 일리노이 주 그랜드릿지(Grand Ridge)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태나대학(University of Montana)과 매코믹신학교(McCormic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무어는 신학교 재학시절(1891년) 무디의 부흥 운동에 감동을 받았으며, 시카고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에 감화되어 조선 선교사로 자원했다. 무어는 아내 로즈 엘리(Rose Ely Moore), 그래함 리, 테이트, 스왈른 등 매코믹 출신 선교사들과 함께 1892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무어 선교사는 한국어를 배우는 틈을 이용해 거리전도에 힘썼다. 그는 내한 이듬해 봄부터 곤당골에서 불우 청소년들을 모아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6월에 곤당골교회(현 승동교회)를 개척했다. 곤당골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새문안교회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였다. 

백정 선교를 통한 신분철폐 주창
그의 공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당시 백정 등 천대받던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백정해방운동’을 주창한 것이다. 1894년경, 자신이 설립한 곤당골학교에서 배우던 학생의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 선교사는 당시 고종의 시의였던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학생의 집을 직접 찾아가 치료해 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백정 박성춘이었다. 천민으로 천대 받던 자신을 왕의 시의를 통해 직접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한 박성춘은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교회에 출석했다. 이후 무어 선교사와 박성춘은 백정들을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펼쳐 많은 백정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특히 박성춘은 백정해방운동에 열심을 다했는데 무어 선교사 역시 이를 적극 후원했다.
교회에 백정 출신 신자가 늘어나자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결국 이들은 따로 홍문섯골교회를 세워 갈라섰다. 그러나 두 교회는 1898년 곤당골교회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다시 합쳤다. 무어 선교사는 다시 합쳐진 홍문섯골교회에서 1901년까지 담임목사로 일했다. 

한강을 오르내리며 서울 서부지역 선교에 헌신
무어 선교사는 한강에 배를 띄워 서울 서쪽 경기 지역과 경기 북부, 황해도 지역까지 다니면서 전도에 힘썼는데, 한강에 띄운 배의 이름은 ‘The Glad Tiding(기쁜 소식)’였다. 이때 개척된 교회는 동막교회와 대현교회 등 그 수가 20여 개에 달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무어 선교사가 소천한 뒤 동막교회를 무어선교사 기념교회로 지정했다.
한편, 무어 선교사는 평소 돌출적이고 과격한 행동으로 격식을 중시하는 선교사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전도여행 중 불교 사찰에 들어가 불상을 두드리는 행동으로 지탄을 받은 적도 있었고, 고종황제에게 예수를 믿을 것을 강권하는 편지를 보내 미국 공사관으로부터 주의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무어 선교사의 헌신적인 복음주의 신앙에서 비롯된 열정의 결과였다. 그는 1906년 12월 22일, 장티푸스로 제중원에 입원한 지 약 두 달 만에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됐다. 조선에 온 지 14년,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무어 선교사가 별세한 이후 박성춘은 승동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1911년), 그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 선교사의 사역이 거두어들인 열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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