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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Hall, Sherwood (1893~1991)

부모의 대를 이은 의료선교사 부부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평생을 헌신한 부모의 뒤를 이어 의료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특히 우리나라결핵 퇴치사업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셔우드가 출생 직후 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주하고 평양선교를 시작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은 1894년 11월, 아버지 윌리엄 홀 선교사가 순직하고 말았다.남편의 뜻을 잇기 위해 다시 한국에 온 어머니 로제타의 양육 아래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셔우드 홀(그는 평양외국인학교 첫 입학생이었다)은 1910년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마운트 유니온대학(University of Mount Union)을 다녔으며, 그곳에서  마리안을 만나 1922년 결혼했다. 
셔우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다짐했고, 이를 위해 그는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의사가 되었다. 특히 어린 시절 남매같이 함께 지냈던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사망한데 충격을 받고 결핵전문의가 될 것을 결심했다. 셔우드는 1926년 4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가 되어 같은 의료선교사인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결핵퇴치운동의 선구자
셔우드 선교사는 1926년 7월부터 1940년까지 24년 동안 해주 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에서 헌신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는 결핵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했다. 1928년 10월에는 해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했으며, 결핵환자들의 건강한 급식과 회복 후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 농장을 세워 운영했다. 그는 평안도 운산금광 자문의사로도 활동했는데 이 역시 폐결핵 환자가 많은 광산의 환경을 고려하여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193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퇴치 자금 마련을 위한 크리스마스 실seal을 발행했다. 크리스마스 실 발행은 우리나라 결핵퇴치 사업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고, 이는 결핵협회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첫 크리스마스 실 도안을 태극기 문양으로 하려고 했으나 반일감정 확산을 우려한 일제의 탄압에 의해 남대문 도안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셔우드 선교사는 진심으로 우리 민족을 사랑했다.
셔우드 선교사는 1940년 가을, 일제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결국 그해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한국을 떠난 셔우드 홀 가족은 부산 항구 앞 공원에서 해주의 교인들이 전해 준 태국기를 나무에 걸고 한민족의 해방과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한국을 떠난 셔우드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서 그곳에서 의료선교사로  22년 동안 헌신했다. 그곳에서도 셔우드 선교사는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63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으며, 캐나다로 돌아가 자선봉사 의사로 헌신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정리한 회고록 <With Stethoscope in Asis : Korea(닥터 홀의 조선회상)>을 펴냈다(197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셔우드 선교사는 1991년 4월, 캐나다에서 리치먼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캐나다에서 화장되어 한국으로 왔으며, 그해 4월 17일 양화진에서 대한결핵협회장으로 안장되었다. 대한결핵협회는 1993년 11월, 양화진 묘지에 공적비를 세웠다. 
양화진에는 셔우드의 부모와 출생 직후 사망한 아들 프랭크(Frank Sherwood 1934-1934)도 묻혀 있으며, 양화진 홀에는 후손들이 기증한 그의 왕진가방과 청진기 등 여러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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