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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Brockman, Frank M.(파락만)


YMCA 설립과 장착의 공로자

브로크만 선교사는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에게 YMCA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1878년 5월, 미국 조지아 주 더글라스(Douglas)에서 태어난 그는 그는 1902년 조지아주립대학(Georgia State University)을 졸업하고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Omaha)에서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YMCA 미주리 주 학생담당이 되었다. 브로크만은 1905년 한국 YMCA 협동총무로 파견되어 내한했으며, 이후 1927년까지 22년 동안 한국 YMCA를 위해 헌신했다.
브로크만 선교사가 YMCA 운동에 투신하고 한국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형인 플레처 브로크만(Fletcher S. Brockman 1867~1944)의 영향이 컸다. 형 플레처는 벤더빌트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 온 윤치호의 친구였고, 1901년부터 중국 YMCA의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01년 한국 YMCA 창립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온 질레트Philip Gillette 선교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자문을 담당하는 등 한국 YMCA 출범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YMCA가 창립된 이후에도 플레처 브로크만은 한국YMCA를 자문하는 등 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에 협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에서 자신과 함께 YMCA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가도록 했다.
1905년 내한한 프랭크 브로크만 선교사는 192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청소년들의 직업 교육, 농촌운동에 헌신했으며, YMCA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그는 하령회라는 이름의 수양회를 통해 전국에 YMCA 운동을 확산시켰으며, 1911년 봄에는 학생회 간사이던 이승만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많은 학교에 YMCA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특히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윤치호, 이승만 등 한국인 동역자가 투옥 또는 망명하게 되고, 질레트 선교사마저 국외로 추방되어 YMCA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이상재를 도와  만신창이가 된 YMCA를 재건하고 오히려 전국적인 규모의 민간단체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YMCA 초대총무로 정착 위해 헌신

1914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산재한 YMCA 조직이 모여 ‘조선YMCA연합회’가 성립되었을 때 브로크만은 초대 총무로 취임했다. 당시는 일제 강점과 이어진 강압통치로 인해 조선인 중심의 사회단체가 대부분 해산되었던 시기였는데, YMCA만은 그 규모를 확대하고 전국 단위 사회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브로크만 선교사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로크만 선교사는 105인 사건으로 복역하던 윤치호가 19015년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바로 그에게 총무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협동총무가 되어 청소년 사업에 집중했다. 이어 1923년에는 신홍우 총무와 함께 농촌운동을 시작했으며, 국제 YMCA 본부로부터 농촌 기술자의 한국 파견과 자금지원을확보하는 등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브로크만 선교사는 1912년 35세의 나이에 제시 윌리스Jessie Willis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으나 첫딸 바바라Barbara를 잃고 말았다.
브로크만은 농촌운동이 본격화될 무렵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2년 후인 1929년 6월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양화진에는 1915년 사망한 어머니(Brockman, W. A.)와 1922년 여덟 살에 죽은 딸이 안장되어 있었는데, 브로크만 선교사 역시 이곳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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