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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Bunker, Dalzell A.(방거(房巨))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
벙커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한 후 40년 동안 교욱 선교사로 헌신한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개척자다.
1853년 미국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Oberlin College)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유니온신학교 재학 중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되어 1886년 7월 내한했다. 당시 그는 헐버트(H. B. Hulbert), 길모어(G. W. Gilmore), 그리고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애니 앨러스Annie Allers와 동행했다. 벙커는 내한 이듬해인 1887년 함께 온 애니 앨러스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결혼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8년간 육영공원 교사로 활동한 벙커는 1892년 3월, 조선정부로부터 교육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호조참의(정3품) 벼슬을 받았다.

감리교 교육 선교사로 헌신
벙커는 1894년 육영공원이 폐쇄되자 아펜젤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1895년부터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이때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정식 임명받았다. 이후 그는 약 30년 동안 선교사는 교육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종래의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 대신 공개적인 토론 방법을 도입하고,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과도 채택했다. 벙커 선교사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순직한 1902년부터 1912년까지 배재힉당장으로 일했다. 이시기에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의 강연을 통해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에 눈뜨게 되었다. 그는 1912년 자신의 제자인 신홍우에게 배재학당장을 물려주었다.
벙커 선교사는 교육자로서뿐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서, 또 교회 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898년경,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고 이승만 등 중심 인물들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벙커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투옥된 수감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고 이들의 요구가 일부 받아들여졌다. 이에 벙커 선교사는 수시로 감옥을 방문하여 이들을 위로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의 전도 덕분에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 고관 출신 양반들이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또 벙커 선교사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과 스크랜턴 선교사의 사직으로 어려움을 겪던 1900년대 초 감리교 선교 사역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당시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와 동대문교회를 맡아 복음 전도자로서 최산을 다했다. 특히 그는 1896년부터 담임한 동대문교회 목회에 헌신하면서 서울 동부 지역 선교에 주력했다. 그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 모임을 구성할 때 적극 참여했으며, 미국성서공회의 한국지부 총무를 맡아 성서 반포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벙커 선교사는 1926년 한국 선교 40년을 맞아 표창을 받은 1926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거주하던 벙커 선교사는 1932년 11월,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1933년 4월 8일, 그의 아내에 의해 양화진에 안장됐다. 6년 뒤 별세한 아내도 그의 무덤에 함께 묻혔으며, 묘비에는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따까지’라는 성경 말씀(아가 4:6)이 새겨져 있다.

Bunker, Annie Ellers(방거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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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회의 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앨러스 선교사는 1860년 미국 미시건 주 버오크에서 장로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리노이 주 록포드대학(Rockford College)에서 공부했으며, 페르시아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보스턴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선교사역을 준비하고 있던 애니 앨러스는 의과대학 재학 중, 제중원에 여의사를 보내달라는 알렌 선교사의 요청을 받은 미국 북장로교의 제안에 따라 의과대학을 채 마치지도 못한 채 한국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1886년 7월, 벙커, 헐버트 등과 함께 내한했다.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한 첫 번째 여성 의료 선교사였다. 앨러스 선교사는 정식 의사는 아니었지만 내한 초기 제중원 부녀과에서 알렌을 도와 의료 선교사로 일했으며, 곧바로 명성황후의 시의가 되었다. 그녀는 황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최초의 여성 의료인이었다. 명성황후를 치료한 공로로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1888년 1월 정2품 정경부인에 제수되었다.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설립 
애니 앨러스 선교사는 함께 내한한 벙커 선교사와 결혼했으며(1887년), 같은 해 6월에는 정동여학당(현 정신여고)을 설립하여 2년 동안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남편 벙커 선교사가 1895년 감리교 계통의 배재학당으로 옮김에 따라 그녀 역시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고, 이후 1926년 은퇴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감리교 선교사로 헌신했다. 
1926년 남편과 함께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애니 앨러스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32년 남편을 양화진에 안장했으며, 1937년 다시 한국에 와 황해도 소래에서 지내다가 1938년 8월 별세하여 양화진에 있는 남편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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