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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Chadwell, Arther E.(차애덕)

일제강점기 북한 지역 선교에 헌신
채드웰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후반 14년 동안 대한 성공회 성장에 기여했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 동안 보좌주교로서 대한성공회 유지에 헌신했다.
그는 1892년 8월, 영국 런던(London) 근교에서 태어났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영국군 경리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와 체션트성공회신학교(Cheshunt College)에서 공부 한 후 1922년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고 이듬해 사제가 되었다.
채드웰 선교사는 1926년 성공회 해외 선교부에 의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애초 성공회신학교장으로 한국에 내한했으나, 당장 시급한 지역 선교를 위해 충청도 진천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여 1928년까지 사역했다. 당시 한국 성공회는 심각할 정도로 사제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후에는 배천, 평양 등 북한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932년에는 북한지역 총사제를 역임했다. 
1930년대 말,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항의 성명을 발표한 후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선교사들이 강제로 추방되던 1940년대 초 채드웰 선교사는 일제 경찰에 의해 단파 라디오를 조지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2년  석장과 한께 강제 출국 당했다.강제 추방된 후에도 채드웰 신부는 인도양 실론의 콜롬보에서 성 미카엘교회 보좌 신부와 교구 군목으로 사역한 후 자신의 조국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인 사제 양성에 기여
채드웰 선교사는 1948년 해방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충청도 청주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정쟁을 당한  피난민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당시 성공회 4대 주교이던 세실 구퍼(A. Cecil Cooper) 신부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된 상황에서 1951년 11월 성공회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한국성공회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한국 주재 성공회 선교사 중 선임 사제였다. 
채드웰 보좌주교의 지도 아래 한국 성공회는 전쟁의 상처와 사제 부족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채드웰 주교는 한국인 사제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당시 이천환, 김경득 신부 등 훗날 한국 성공회의 지도자가 된 이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채드웰 주교는 1956년 데일리 신부가 5대 주교로 임명된 뒤에도 보좌주교로 1963년까지 헌신했다.
1963년 은퇴한 후에도 채드웰 선교사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인천과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도왔다. 부산으로 이주해 입양한 딸의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던 채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별세하여 양화진 성공회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에는 ‘주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며 단련하고 주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t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라는 성공회 성가의 한 구절이 한글과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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