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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소개

 
Hall, William James(하락)&Hall, Rosetta S.

내한 3년 만에 순직
양화진에는 2대에 걸쳐 4명의 선교사가 모두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 가족의 합장묘가 있다. 이들 4명 선교사의 선교사역 기간을 합치면 79년에 달한다. 이 묘에는 이들 4명 외에 2명의 어린 자녀도 함께 묻혀 있다.
윌리엄 홀은 1860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글렌뷰엘(Glen Buell)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홀은 10대 후반에 사경을 넘나드는 병을 앓았으나 기적같이 회복되는 체험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방황을 끝내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한 결과, 25세에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홀은 해외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고, 대학 3,4학년을 뉴욕 벨레뷰병원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후 1889년 의사가 되었다. 
해외선교의 소망을 품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홀은 역시 해외 선교를 준비하던 의사 로제타 셔우드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새로운 선교지로 부상한 조선 선교사로 부름받았다. 기혼 여성은 선교사가 될 수 없었던 당시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규정에 따라 일단 약혼만 한 뒤 로제타는 1890년 10월에, 홀은 1년 뒤인 1891년 12월에 한국에 왔다. 

감리교 평양 선교의 개척자
홀 선교사와 로제타의 결혼식은 1892년 6월 올링거 선교사 주례로 서울 스크랜턴 대부인 선교사 관사에서 거행됐다. 결혼 직후 홀 선교사는 평양 선교 책임자가 되어 평양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는 등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펼쳤고, 아내 로제타 홀은 여성 전문병원인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했다. 
홀 선교사는 1894년 초부터 평양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학교를 세우고(광성학교), 병원을 설립했으며(평양기독병원), 교회를 개척했다(남산현교회). 그러나 홀 선교사는 1894년 평양을 중심으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한국에 온 지 3년 만인 1894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순직하여 양화진에 안장됐다.

Hall, Rosetta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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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성병원 보구여관 정착시켜
로제타 선교사는 1865년 9월, 미국 뉴욕 주 설리번 카운티Sullivan County에서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뉴욕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토번J. M. Thoburn 목사 부부로부터 의료 선교의 필요성을 전해 듣고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로제타는 어린 시절 척추에 이상이 있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완치되지 못한 상태였고, 결핵성 종양을 앓는 등 병약한 상태였으나 의료 선교사의 꿈을 내려놓지 않았다.
1889년 펜실베이니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로제타는 뉴욕 빈민가 자선의 집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면서 제임스 홀을 만났다. 그들은 약혼을 하였고, 함께 의료 선교사가 될 것을 약속했다. 로제타는 홀보다 1년 앞선 1890년 10월 내한하여 국내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으로 설립된 정동 보구여관에서 건강 악화로 사임하게 된 하워드 선교사의 후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로제타 선교시는 보구여관 부임 10개월 동안 모두 2천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다. 
1891년 12월 로제타의 약혼자인 홀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두 사람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후 1892년 8월부터 1894년 5월까지 2년 동안 각각 떨어져 서울과 평양에서 살아야 했다. 드디어 1894년 5월 로제타도 평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꿈같은 신혼이 시작되었으나 이 생활마저 청일전쟁 때문에 한 달 만에 끝났다. 더구나 청일전쟁 와중인 1894년 11월 24일, 홀 선교사가 순직함으로써 두 사람의 부부생활은 2년 5개월만에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홀 선교사 순직 당시 그녀에게는 두 살짜리 아들(셔우드 홀)이 있었고, 딸(에디스 M. 홀)을 잉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교육 시작
홀 선교사가 순직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던 로제타 선교사는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홀 선교사의 뜻을 잇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녀는 평양에서 약 20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으며, 그곳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Hall Memorial Hospital과 여성을 위한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설립하여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 선교에 주력했다. 특히 선교 도중 만난 맹인 소녀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법을 개발하여 광혜여원에서 맹인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는 후일 평양맹아학교로 발전했다. 자신이 일하던 광혜여원이 불에 타 없어지고 새로 세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을 때 그녀는 평양 주변 농촌과 산촌을 찾아다니며 소외된 이들을 치료했다.
에스더 등 여성의사 육성의 초석
로제타 선교사는 우리나라 여성 의료인 양성에 초석을 놓았다. 첫 사역지였던 보구여관에서 만난 여성 의료보조원 김점동을 홀 선교사 사후 미국에 돌아갈 때 데리고 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로 키워냈는데, 박에스더가 바로 그녀다.
또 로제타 선교사는 1917년 평야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동대문 해리스병원에서 일하였고, 1920년에는 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여 이를 경성의학교로 발전시켰다.(이 학교는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1930년대에는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서 헌신하던 아들 셔우드 홀 선교사의 사역을 도왔다. 그녀는 1935년 선교사를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1951년 미국 뉴저지에서 별세했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한 후 남편이 묻힌 양화진에 합장되었다. 유복녀로 태어났으나 3년 만에 하늘나라로 간 딸 에디스(Edith M. Hall 1895~1898)도 양화진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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